평소와 다름없이 따분한 이야기만을 늘어놓는 선생의 목소리가 유독 귓가에 들어오지 않던 날이었다. 반 전체를 가득 채우는 누군가의 졸음 가득한 숨소리를 들으며 오르내리는 눈에 익은 커다란 등판만을 멍하니 바라보던 양호열은 제게 곧 닥칠 일을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다, 빈자리 01 w.기백 상황은 순식간에 벌어졌다. 유독 재미없기로 소문난 국사 수업 중에 앞문...
모두에게 ‘기적의 생존자’라고 불리우던 남자는 단 한 번의 총성에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렸다. 퍼렇게 빛나는 모니터 앞에 앉아 정신없이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던 남욱의 위로 둥그런 그림자가 드리웠다. 밤새 들려온 소식에 푸른 기와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너나할 것 없이 바쁘게 제 할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그중 누구보다 빠르고 많이 움직여야 할 청와대 비서실장은 ...
[영진남욱] 60일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간 참사 이후 모든 것들이 급박하게 바뀌었다. 갑작스레 대한민국 최고의 권력을 쥔 권한대행의 등장과 각 부서의 장관, 국회의원들을 잃은 정치계는 바람 앞의 등불처럼 끊임없이 흔들렸다. 하루가 다르게 생겨났다 사라지는 무수한 가십들은 사람들에게 불안과 공포를 각인시켰다. 모든 사람들이 대립했고 옳고 그른 것이 뒤...
[그마로키] 밝은 빛 하나 들어오지 않은 침실은 색색들의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대부분이 용도를 쉬이 파악하기 어려운 것들 이었으나 거울로 이루어진 천장, 한 쪽에 정리되어있는 반짝이는 옷 등이 이 방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가늠케 했다. 역시나 붉은 색의 이름 모를 원단으로 이루어진 이불더미 속에서 가늘고 하얀 팔 한 쪽이 제 모습을 드러냈다. 싸늘한 아침...
[락원호] 찰나의 순간 파란 테이블, 붉은 컵라면 두 개, 포장이 벗겨지다 만 단무지 하나. 제 앞에 무성의하게 놓인 것들을 훑어 내리는 남자의 시선이 천천히 제 맞은편 상대방에게 향했다. 언제나처럼 살짝 찌푸려진 미간의 소유자는 바쁘게도 양손을 놀려댔다. 투명한 비닐 포장지가 무참히 벗겨지고 매콤한 분말가루가 공중에 흩날릴 때도 하얀 티셔츠의 남자, 락의...
[락원호] 공허(空虛) 오래된 나뭇 바닥이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남자의 두터운 부츠 바닥에서 떨어져 나온 눈덩이들이 바닥에 천천히 스며들고 있었다. 오두막집에 이제 막 발을 들인 남자는 그 누구보다 자연스럽게 벽난로 앞으로 향했다. 일정한 소리를 내며 타들어가는 불길이 그의 얼굴 위에서 일렁거렸다. 그는 꽤 오랜 시간을 난로 앞에 서있었다. 모든 것을 집...
[락원호] Melting Point 새것처럼 매끈한 휴대전화가 짧게 진동했다. 순식간에 밝아지는 액정 속 곧게 뻗은 글자가 남자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내일모레 20시, 에이크 호텔 레스토랑 VIP 룸. 다시금 검게 변한 화면을 내려다보던 원호가 작게 숨을 내쉬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이우 해운 조직도가 그려져 있는 화이트보드 앞으로 뻗친 머리가 볼품...
[락원호] 아침 무섭도록 휘몰아치는 눈보라에 창문이 흔들렸다. 오래된 나무는 늦겨울 바람을 쉬이 견뎌내지 못했다. 창밖으로 펼쳐진 무(無)의 세상이 눈부셨다. 그 밝음은 종국엔 온기와 어둠까지도 모두 집어삼켰다. 태양이 저물지 않았고 밝음은 사라질 줄 몰랐다. 계속해서 눈이 휘날렸고 살아있는 것의 온기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굴뚝에서 희뿌연 연기가 솟...
[락원호] Sunday 살짝 열린 창문 틈 사이로 늦여름의 바람이 밀려들어왔다. 순전히 누군가의 취향이었던 베이지색 커튼이 침대 위에서 펄럭였다. 따듯한 햇살이 남자의 감은 눈 위를 장난스럽게 배회했다. 깃털모양의 구름이 왼쪽으로 사라져갈 때쯤이 돼서야 하얀 이불에 감싸여있던 남자가 느릿하게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잠의 손길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남자의 흐릿한...
[락원호] 생크림 케이크 커다란 타이어가 미끄러지듯 제자리에 멈춰 섰다. 차의 움직임을 따라 거무죽죽하게 생겨난 바퀴자국이 도로위에 가득했다. 운전석의 사내가 어찌나 급하게 안전벨트를 푸는지 자동차가 계속해서 양옆으로 흔들렸다. 차에서 내린 남자의 손에는 작은 분홍색 상자를 쥐어져있었다. 그는 여전히 켜져 있는 헤드라이트를 뒤로 한 채 눈앞의 집으로 바삐 ...
[락원호] 無題*엠프렉 (남성임신)요소 주의 커다란 가방을 들고 있는 남자의 넓은 등이 잘게 떨렸다. 가쁜 숨을 내쉬느라 어깨는 빠르게 오르내렸고 이리저리 엉켜있는 검은 머리칼은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람에 나부꼈다. 이제 막 새순이 고개를 내밀기 시작하지만 그는 두꺼운 점퍼와 목도리에 둘러싸여 있었다. 마치 봄이 시작되려 하는 것도 모른 채 이곳에 도...
[락원호] 재회 (再會) 금요일 밤의 거리는 언제나 활기가 넘쳤다. 해가 지고 땅거미가 내려앉으면 휑하게 비어있던 골목 어귀에 빨간 포장마차들이 하나 둘씩 문을 열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따끈한 오뎅탕, 알싸하게 맵지만 그만큼 놓을 수 없는 빨간 닭발. 그중에서도 그가 제일 좋아하는 건 부드럽고 폭신한 계란말이였다. 자극적이지도 않으면서 대충 끼니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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